명예, 퇴임교수
이재창 (Lee, JaeChang)
- 직위
- 명예/퇴임교수
- 연구분야
- Non-Parametric Statistics
- 학위
- 박사
학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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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학위 : Ph.D., Statistics, Ohio State University, 1972 University
경력 및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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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임기간 : 1979-2007 통계학은 어떻게 공부하게 됐습니까? 이재창 주위의 사람들은 항상 나에게 어떻게 하여 통계학을 전공하게 되었는지를 묻는다. 그리고는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통계학 참 좋은 학문이지요. 그리고 매우 중요하고 유망한 분야지요.” 라고 이야기 해준다. 이러한 이야기는 우리 모든 통계학도 들은 절대적으로 동감한다. 내가 통계학을 공부하게 된 것은 유학 중의 일이지만 그보다 앞서 대학입학과 도 무관하지 않다. 1960년 4월 당시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경제학과에 입학하였다. 물론 그때는 우리나라에는 통계학전공이 있는 대학은 하나도 없었고, 있었어도 내게 관심을 끌지도 못했을 것 같다. 그 당시 경제학을 택하게 된 것은 위로 형님 세분이 계신데 한 분은 의대에, 또 한 분은 문리대에 그리고 또 한 분은 법대에 다니고 있어 나는 다른 단과대학으로 진학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머지 여러 단과대학 중 공대, 농대, 상대로 좁혀지고 그 중에서 서울 시내에서 비교적 가까운 종암동의 상대를 찍었다. 입학과 동시에 4.19 혁명을 맞았고 이듬해에는 군사혁명을 겪었으니 언제 제재로 대학 맛을 볼 기회도 없었다. 일학년 때는 교양과목을 주로 택했으나 통계라는 새로운 과목도 접하게 되었다. 그때 선생님께서 계량경제학 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소개하셨는데 나는 그런 학문을 하면 좋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는 수입서적을 파는 서점에서 Klein 의 Econometrics 책을 한 권 샀다. 그런데 그 내용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후 2학년 일학기를 마치고 군에 입대하였고 당시에는 학보병이라 하여 18개월이면 제대하는 좋은 제도가 있어 1963년 봄에 복학하게 되었다. 그렇게 학창생활을 하던 중에 6.3 사태로 불리는 큰 소용돌이를 만나고 그때 주동자로 지목이 되어 지명수배를 받고 피신했으나 그 후 다시는 학교로 돌아올 수 없었다. 1963년 3월 상과대학의 몇몇 친구들과 AIESEC 라는 국제경제상학학생연합회라는 학생단체를 만들었고 시내 5개 대학에 도 각 대학지회가 결성되었으며 이를 토대로 한국위원회가 창립되었다. 이모임의 총회가 마국 프린스턴 대학에서 열렸으며 한국을 대표하여 네 명의 학생이 참석하게 되었고 나도 대표단의 일원으로 미국여행을 하게 되었다. 참으로 좋은 기회로 회의 중에는 당시의 케네디 대통령은 백악관 로즈가든에서 각국대표단과 참가국의 대사들을 초대한 파티를 열어 주었다. 케네디 대통령은 우리 한국대표단에게 다가와 한국학생들의 4.19혁명을 높이 평가하며 우리들을 일일이 악수하며 칭찬해 주었다. 그 자리 초청된 한국대사도 어깨가 으슥하여 졌다며 우리를 환대하여 워싱턴 일대를 구경시켜 주었다. 귀국 길에 그레이하운드 버스로 대륙을 횡단하였는데 가는 곳 마다 AIESEC 지회회원들의 주선으로 회원대학을 두루 돌아 볼 기회도 있었다. AIESEC 관계로 나는 학생활동에 점차 깊이 관여하게 되었고 종국에는 6.3 사태의 주모자로 지목되게 되었다. 그런데 AIESEC 는 국제적으로 인턴쉽을 교환하고 주관하는 단체로서 사실 정치 문제와는 직접 관련은 없었다. 나는 그 해 여름 샌프란시스코의 뱅크 오브 아메리카에서 10 주간 AIESEC 연수생으로 이미 결정되어 있었으나 국내 사정은 전혀 갈 형편이 못 되었다. 그러든 어느 날 워싱턴 방문 시에 잘 알게 되었던 대사께서 국무총리로 취임하게 되셨다. 나에겐 마지막 하나의 희망으로 그를 찾게 되었고 결국 만남이 어렵게 성사되어 미국 행이 극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1964년 7월 나의 미국생활은 이렇게 샌프란시스코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 후 대학 학장님께서 보내주신 한 장의 편지는 절망적인 것 이었다. 내가 귀국하게 되면 면 퇴학결정이 기다리고 있으니 가능하면 미국에 남아 공부를 계속하라는 말씀이었다. 나에게는 커다란 시련이었다. 주변의 선배들과 상의 한 끝에 미국에 계속해서 체류하기로 하고 그들의 권유로 비교적 학비도 싸고 조용한 분위기인 중부 지방으로 가기로 결심하였다. 10월 하순 어느 날 그레이하운드 버스에 몸을 싣고 오하이오 주립대학(OSU)이 있는 컬럼버스를 향했다. 이틀 밤과 낮으로 달려 도착한 이곳에서 돈도 별로 없고 교환 비자도 거의 끝나가는 상황에서 공부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만 했다. 그 곳의 한국학생 선배들과 국제학생 advisor 선생님은 나에게 큰 도움을 준 잊을 수 없는 은인들 이었다. 어려운 상황에서지만 다음 해 봄학기에 경제학과에 편입하였고 두 가지 아르바이트를 하여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고 Matrin Krum 장학금(한국전에 사망한 아들을 기리기 위해 한국학생에게 만 주는 장학금)으로 학업을 계속할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 서울대학에서 얻은 학점은 모두 인정받았으나 OSU의 졸업을 위해서는 2년 이상이 더 걸리게 되었다. 일학년 영어 과목 셋, 수학 두 과목, 미국 역사 두 과목, 생물, 지리, 기초물리 에다 철학개론은 물론 상법, 세계지역학 과 보건기초과목에 ROTC 15학점이 모두 추가로 이수해야 하는 과목들 이었다. 그러니 졸업 할 때 보니까 학점 수는 넘쳐났다. 그런데 ROTC 가 졸업에 필수로 되어 있는 소위 미국의 Land Grant 대학들에서는 그 당시에 외국학생까지도 남학생이면 반드시 이수해야 하는 엄격한 규정이었다. 그런데 냉전시대였던 당시에 만들어진 이러한 미국대학의 필수과목에 대한 유일한 대체과목이 오늘날 내가 통계학을 하게 한 큰 인연을 만들어 줄지는 그때는 미처 몰랐다. 왜냐하면 ROTC를 대체할 수 있는 과목은 15 학점의 고등수학이나 15 학점의 러시아어과목 밖에는 없었다. 미국과 팽팽하게 맞서 있던 러시아에 대한 지식이나 모든 과학의 기초인 수학을 대체가능 과목으로 지정한 것은 매우 흥미 있는 국가전략적인 배경이 있었던 같다. 그때 수학 대신 러시아어 과목을 택했었다면 나의 인생행로는 오늘의 나와 전혀 다른 것 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advance calculus, linear algebra 와 number theory 를 택해 ROTC 학점을 대신하였다. 1967년 학부 졸업을 앞두고 경제학과의 세계적 계량경제학자로 알려진 Lesparence 교수를 찾아갔다. 그리고는 대학원에서 계량경제학을 전공하고 싶다고 말했더니, 대뜸 하시는 말씀이 수학과에 가서 석사를 먼저 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것이다. 심사숙고 끝이 캠퍼스를 가로 질러 대각선위치에 있는 수학과 건물로 갔다. 마침 복도에서 인자하게 생긴 노교수 한 분이 도와 줄 것이 무슨 일 인가하시며 자기 연구실로 안내하셨다. 바로 이분이 그 후 나의 지도교수가 되신 Ransom D. Whitney 교수셨다. 나로부터 좌초지정 이야기를 들으시자마자 손 벽을 치며 잘 되었다고 하시며 그 당시 수학과에는 조교가 부족하니 가을학기부터 calculus 한 과목을 가르치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기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학과를 옮기는 두려움으로 수학과의 조교가 되어 수학 석사과정을 시작하게 되었다. Real analysis (measure theory) 와 수리통계학 그리고 수학기초 세미나과목을 듣게 되었다. 물론 수리통계과목은 Whitney 교수의 과목이었다. 당시는 통계학과가 수학과의 일부였으므로 나는 수학석사를 위해 해석학 전공이 된 셈이다. 그리고 특별히 석사과정을 위한 커리큘럼은 따로 없었던 시절로 박사과정에서 요구하는 세 가지 field examinations 중 하나만 합격하면 석사학위를 수여하는 제도가 있었다. 2년 후 해석학시험으로 석사를 받았다. 그리고 다시 경제학과에 가서 세미나를 청강하였으나 이미 나의 흥미를 더 이상 유발하지는 못했다. 이렇게 하여 나는 Whitney 교수의 지도하에 비모수통계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1972년 박사학위를 끝낼 무렵에 통계학과는 수학과로부터 독립된 별개의 학과가 되어 통계학으로 학위를 받게 되었다. 돌이켜 보면 계량경제학, ROTC필수 그리고 수학석사 이러한 순서로 이들이 나를 통계학으로 안내한 것 같아 내게는 이들 하나하나가 귀중한 중간과정의 길잡이가 아닐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지금에 와서 보면 통계학 교수로서 일하는데 크게 도움이 되었으며, 다시 생각해봐도 이렇게 어렵게 연결된 과정도 통계학도에게 유익한 길이 될 것도 같다. 요wm음 강조하는 학제적 공부는 나에게는 자의 반, 그리고 타의 반으로 된 셈이다. 이렇게 한 평생 통계학으로 살아 온 나는 이러한 지나온 과정이 너무나도 다행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통계학이 그 자체 보다는 남의 연구를 도와주는 서비스 학문으로 더 큰 가치를 인정받고 이것이 매개가 되어 많은 분야의 연구에 직 간접으로 참여하고 체험하며 그들에게도 도움을 주었던 점 또한 보람된 일이 아닐 수 없다. 학위를 받은 후 미국의 작은 대학에서 강의하고 있을 무렵에는 당시 연방표준국(NBS)이라는 곳에서 매년 여름 객원연구원으로 통계 컨설팅 실무를 익힐 기회가 있었고, 1978년에는 해외유치과학자의 신분으로 한국표준연구소의 창립 멤버로 귀국하여 metrology 분야를 접하게 되었다. 모든 측정이 통계라는 점과 모든 통계 역시 측정이라는 점을 너무도 확실하게 체험할 수 있는 기회였다. 기리고 통계학이 유용하다고 말해준 주위 사람들에게 다시 한 번 확실하게 그렇다고 대답할 신념이 생겼다. 그 후 현재 내가 있는 고려대로 옮긴 후에도 수많은 응용과학의 연구 과제를 접하게 되었다. 내게 누가 어떻게 하여 통계학을 택하였는지 묻는 다면, 나는 자신 있게 신이 내게 준 선물이었다고 대답할 것이다. 모든 것을 다시 한 번 시작해도 또 통계학을 선택할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정년퇴임을 앞두고 2007년 8월